너의 비밀, 너의 거짓, 너의 이기심...
지옥계곡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싸늘한 등을 가진 아버지, 사고 이후 입을 닫아버린 친구들,
연인의 죽음에도 태연한 남자친구, 허락도 없이 그녀를 탐한 그림자.
지옥계곡은 언제까지 그들의 비밀을 지켜줄 것인가?
죄를 묻으려는 자와 벌하려는 자, 사랑을 이용한 자와 허락 없이 사랑한 자...
그곳에 들어선 순간, 비밀은 죄가 되고 진실은 통증이 된다!
옮긴이의 말
첫눈이 흩날리는 어느 겨울, 20대 초반의 앳된 여자가 독일 추크슈피체 산의 깊고 험준한 지옥계곡을 슬픈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그 시각 정찰을 하던 산악구조대원 로만은 극적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지만, 여자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벼랑에 몸을 던진다. 로만은 공포에 질려 있던 그녀의 눈빛 때문에 매일 밤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녀가 투신한 원인을 알아내려 애쓴다. 한편 사건 이후, 죽은 여자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둘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심리 스릴러의 제왕답게, 저자는 잔인한 장면들을 굳이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도 독자들에게 섬뜩함과 공포를 안긴다. 천천히 진행되던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긴박감을 더해가고, 등장인물들의 세말한 심리묘사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디딤돌' 역할과 '미끼' 역할을 겸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시제를 달리하며 불쑥 끼어드는 '누군가'의 독백. 불안정한 심리를 치밀하게 반영해낸 1인칭 시점의 이 이야기 구조는 사건이 진행될수록 퍼즐처럼 시시각각 단서를 던지며 독자의 심장을 그야말로 쥐락펴락한다.
독자들이 이 플롯 속으로 단숨에 빠져들 만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 주변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소설 속에서 목격하기 때문이다. 친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문제가 생긴 순간에 외면하는 친구들, 겉으로는 안락해 보이지만 소통이 없는 가정환경,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남자의 그릇된 욕망... 자신의 처지만이 가장 중요한 각박한 현실 속에서 타인을 위해 조금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2초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로만은 그녀의 푸른 눈을 아주 오래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여자가 시선을 돌려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손을 빼려고 비틀기 시작했다.
"안돼, 그러지 말아요!"
로만이 소리쳤다.
하지만 여자는 도와주지 않았다. 돕기는커녕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계속 손을 비틀었다. 로만은 힘이 빠지고 근육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펴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씩, 조금씩 여자가 미끄러졌다.
"안돼!"
그가 다시 외쳤다.
갑자기 로만의 손이 텅 비었다. 아주 잠깐, 계곡 허공에 떠 있는 듯하던 여자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암벽에 튕기며 추락하던 몸은 뾰족한 산마루에 다시 한번 부딪혔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가득한 좁은 강에 떨어졌다. 숨이 멎은 몸을 물결이 쓸어갔다. 사체는 저수지 모퉁이를 돌아 거품이 이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라우라 바이더가 지옥계곡에서 자살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단서라고는 마지막 목격자인 로만 예거가 기억하는 그녀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마라 란다우에게 보낸 '위로'라는 단문 메시지뿐. 라우라 바이더의 투신 이후,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차례차례 잔인하게 죽어나간다. 한편, 로만 예거는 마라 란다우에게서 과거 라우라 바이더가 친구들과 지옥계곡을 등반했었고, 그때 애인인 리하르트 슈뢰더(리키)가 지친 라우라 바이더를 낯선 남자에게 맡기면서 그녀가 변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녀의 친구들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그 옆의 비어 있는 탈의실로 얼른 들어간다.
그러자 엄청난 평온과 기이한 흥분이 동시에 나를 에워싼다. 정말 오랜만에 그녀와 이렇게 가까이 있다. 우리를 가로막는 건 싸구려 목재로 만든 가느다란 벽뿐이다. 나는 왼쪽 귀를 벽에 대고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너무 얇아 건너편에 있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성을 마비시킬 듯한 향기도 내 코로 스며든다. 그녀가 방금 사용한 향수가 그녀의 살 냄새와 뒤섞인다. 나는 눈을 감고 양손을 벽에 바짝 붙이고는 귀를 기울여 그녀를 느낀다.
"그녀는 나를 못 본다네......"
나지막하게 속삭이지만 그녀는 들을 수 있다. 뭔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무 벽 저편의 떨림이 느껴진다.
갑자기 그녀가 벽을 세차게 후려친다.
"꺼져, 꺼져, 꺼져!"
라우라 바이더가 지옥계곡에서 만났던 낯선 남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낯선 남자는 라우라 바이더의 투신자살과 그녀 친구들의 죽음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책장을 한장한장 뒤로 넘길수록 얽혀있던 실타래가 서서히 풀리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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